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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SOL
2013.03.28 20:39 law
[Ⅰ] - 제1차 북핵위기와 제네바합의

1. 제1차 북핵위기
 
1993년 1월 31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영변 근처의 핵폐기물 처리장소로 의심되는 2개 시설에 대한 사찰을 허가할 것을 북한에 요구하였다. 북한이 이를 거부하자 IAEA는 2월 10일 동 시설들에 대한 특별사찰을 이듬해 3월 25일까지 받을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3월 10일, 북한은 동 시설들은 핵개발과 무관한 일반 군사시설에 불과하므로 사찰대상이 될 수 없으며, 그러한 사찰은 북한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IAEA의 특별사찰에 대한 거부의사를 재차 밝혔다. 그리고 3월 12일, 북한은 준전쟁상태를 표방하고, IAEA의 특별사찰 요구를 비난하며 NPT 탈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NPT에 복귀하는 조건으로 한미합동군사훈련의 중단, 남한 내 미군 핵시설 공개, 미국의 대북 핵위협 감소, IAEA의 공정성과 중립성 회복을 내건다.
 
NPT 탈퇴선언 직후 북한은 노동 제1호 미사일을 동해로 시험발사하였다. 이에 미국이 북한의 핵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여 제재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하였고, 그에 대해 북한은 ‘제재조치는 곧 선전포고’라며 강경하게 맞섰다. 또한 IAEA는 북한으로부터 조사단을 철수시켰으며 안보리는 북한의 NPT 탈퇴선언 재고를 촉구하는 결의안 825호를 채택하기에 이른다.
 
한편 남한 정부는 북핵 문제를 국제공조체제를 통하여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북한과의 대화를 이끌어내기로 하고, 1993년 4월 21일 태국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에서 중국으로 하여금 미국과 북한의 대화를 촉구하도록 한다. 그렇게 하여 북한과 미국은 1993년 5월 10일 고위급 회담 개최에 합의한다.

2. 제네바합의
 
1993년 6월 2일부터 11일까지 4차에 걸친 첫 번째 북미회담이 유엔본부에서 이루어진다. 협상 끝에 북한과 미국 정부는 향후 수평적인 대화를 지속할 것을 전제로 북한이 NPT 탈퇴를 임시적으로 정지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두 번째 고위급 회담은 1993년 7월 14일부터 19일까지 6일 동안 제네바에서 이루어졌다. 이 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은 핵확산금지를 전제로 북한이 보유한 흑연원자로를 경수로 원자로로 대체하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회담이 이듬해인 1994년 8월과 9월 베를린에서 핵전문가 회담을 거쳐 9월 23일부터 10월 17일까지, 미국의 대표 갈루치(R. Gallucci)와 북한의 대표 강석주 사이에 제네바에서 진행되었다. 이 가론 제네바합의(Agreed Framework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에서 북한과 미국은 핵문제에 대하여 일괄타결을 짓는다. 10월 21일에 발표된 합의문 조항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i) 미국은 2003년까지 2000MW 발전능력의 경수로 제공을 위한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흑연로 동결로 인한 에너지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북한에 매해 50만톤의 중유를 공급하며, 한반도 비핵화, 안보와 관련하여 북한에 대하여 핵위협을 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고, 북미 양국이 정치 및 경제관계를 개선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 ii) 북한은 흑연로 및 기타시설을 완전동결하고, 경수로 완공 시 흑연로를 완전 해체하고, IAEA의 사찰을 재개하고, 과거 핵 활동에 대한 투명성을 규명하고 이를 위한 IAEA의 특별사찰을 허용하며, NPT를 탈퇴하지 않고 조약의무를 준수하고, 남북공동선언의 이행조치를 강구하고 남북대화를 재개하며, 북미 양국이 정치 및 경제관계를 개선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
 
제네바합의는 법률적인 구속력을 동반하는 조약이라기보다는, 미국 상원의 인준이 필요 없는 Framework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동의서에 가까웠다. 또한 과거 북한의 핵개발 여부를 철저하게 파헤치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북핵문제를 진정시키고 향후의 핵개발을 방지하거나 늦추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이 합의를 통해 미국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중요한 이해조정자로서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고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북한은 흑연원자로를 폐기하는 조건으로 경수로를 무상으로 유치하고, 외교적인 고립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합의문의 내용에는 북한이 협의내용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에 어떤 제재조치를 취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철저한 비공개 회담 속에 도출된 합의문이었지만 그 문장들의 구성이 애매모호해 의미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남한의 역할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북한에 경수로를 설치하고 중유를 공급하기 위하여 미국과 남한, 일본은 1995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를 발족시켰다. 제네바합의 과정에서 배제된 남한은 KEDO의 경수로 지원과정에서 보다 구체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을 희망했다. 그리고 미국은 미국대로 국내 여론을 의식해 재정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한국과 일본에게 지원과정의 주도적인 역할을 전가하였다. 결국 약 50억 달러의 예산이 소요되는 경수로 사업에서 30억 달러를 남한이 부담하게 되었다.
 
제네바합의 이후 북한의 핵개발은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동결된 것처럼 보였으며, 1999년의 미사일 위기를 제외하면 한반도는 8년간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게 된다. 

[Ⅱ] - 제2차 북핵위기와 베이징회담

1. 제2차 북핵위기
 
9.11 테러 이후 미국 정부는 대량살상무기 보유국에 대해 강경노선을 취하기 시작한다. 2002년 1월 29일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연두교시에서 북한을 이라크, 이란과 더불어 악의 축(Axis of Evil)로 규정하고, 4월에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정권들이 가장 위험한 무기로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재차 강조한다. 부시는 또한 또한 9월 20일 국가안보전략보고서에서 ‘적성국과 테러집단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선제공격 중심의 군사전략을 운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호칭도 ‘우려대상국’에서 ‘불량국가’로 바뀌었다.
 
미국의 이와 같은 대북 강경노선에 대해, 북한은 처음에는 미국 자체에 대한 적극적인 정치적 반격은 피하고 대신 미국의 대북강경정책을 규탄하면서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는 간접적인 대응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회적인 대응도 2002년 10월로 끝이 난다. 10월 3일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가 북 외무성의 김계관 부상에게 북한의 우라늄 농축계획에 대한 증거를 내보이며 핵개발 사실을 시인하라고 다그치자 강석주 제1부상이 ‘물론 우리는 핵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며 ‘핵무기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고 발언한 것이다. 이것이 가론 제2차 북핵위기의 발단이다. 북한이 핵개발 사실을 시인하자, KEDO는 2002년 12월분부터 북한에 대한 중유 지원을 중단할 것을 결의한다.
 
이러한 KEDO의 결의에 대하여 미국 대통령 부시는 같은 해 11월 15일의 대북성명에서 “… KEDO의 결정을 환영한다. … 북한은 농축우라늄에 기초한 핵무기프로그램을 적극 추구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이 프로그램은 지역 및 국제안보와 국제적인 핵비확산 제도를 훼손하는 것이다. 북한은 또한 북미기본합의서, 핵비확산조약(NPT),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협정, 한반도비핵지대화 남북 공동선언 등을 직접적으로 위반했다. 북한의 이같은 명백한국제약속 위반은 묵과되지 않을 것이다. …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은 모든 책임있는 국가들에 하나의 도전이다. …우리는, 이 상황을 다루는 단 한가지 방안은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완전하고 가시적인 방법으로 제거하는 것이라는 결의로 단합되어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KEDO의 결의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12월 12일 핵동결조치의 해제를 선언하였다. 또한 12월 21일부터 24일 사이에 영변 5MW 원자로 동결 감시카메라를 제거하고 방사화학실험실과 핵연료봉 제조공장의 봉인을 해제했으며 감시장비를 정지시키는 조치를 취한다. 더하여 27일에는 핵시설에 상주하는 IAEA 감시단원을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원자력발전소의 폐연료봉 보관을 이유로 들어 방사화학실험실을 가동할 것을 선언하게 된다.
 
이듬해인 2003년 1월 10일 북한은 정부성명에서 “핵무기를 만들 의사가 없지만, 미국의 대북 강경책을 비난하면서 NPT로부터 탈퇴하고 IAEA와의 담보협정의 구속에서 완전히 벗어난다”고 전격 선언한다. 또한 이튿날인 1월 11일 최진수 주중 북한대사가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조차도 취소할 수 있다.”고 경고함으로써, 여태껏 핵 문제에 머물러 있었던 미국과의 갈등전선을 미사일 문제로 확대할 수 있다는 의사까지 밝히기에 이른다. 결국 2003년 2월 12일 IAEA 특별이사회가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로 회부하기로 결의한다. 이로써 1994년의 제네바합의로 일단락되었던 북핵문제가 10년만에 또다시 유엔 차원에서 논의되게 되었지만, 뒤이어진 안보리의 논의도 상임이사국인 중국의 반대로 의장성명을 도출하는 데 실패한다. 이렇게 하여 북핵문제는 다자협상의 틀로 넘겨지게 된다.

2. 베이징 3자회담
 
다자회담 제의에 대하여 북한은 ‘미국의 교묘한 술책’이라고 비난하다가, 2003년 3월 초 중국 특사의 방문 이후 다자회담 수용의 뜻을 보인다. 그리하여 중국이 중재역할을 담당하고 북한과 미국 양국이 수평적인 대화를 하는 전제에서 2003년 4월 23일 베이징에서 3자회담을 개최하게 된다. 여기에서 북한은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였고 회담은 아무 가시적인 소득 없이 끝났다.
 
이후로 북한은 미국의 외교적 압력에 공세적으로 대응하면서 핵억제력 강화를 주장하는 한편 다자회담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또한 미국이 북핵문제를 유엔에 상정할 경우 북한이 비상시에 취할 행동조치를 강행하겠다고 선언한다. 북한은 2003년 5월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는 ‘먼저 조미쌍무회담을 하고 계속하여 미국이 제의하는 다자회담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으나, 같은 해 6월 18일에는 ‘미국이 표방하는 그 어떤 회담에도 더 이상 기대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언급하며 핵억제력 강화를 재차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북한은 결국에는 로동신문을 통해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촉구하였고, 중국 외교부 부부장 다이빙궈의 중재로 마침내 7월 31일 6자회담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Ⅲ] - 6자회담

1. 제1차 회담
 
그렇게 하여 최초의 6자회담이 2003년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베이징에서 이루어졌다. 이 회담은 각 국가들의 외교정책에 터잡은 기조연설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참가국들은 저마다 지금까지 해온 주장들을 반복할 뿐이었고, 외교적인 진전은 전혀 없었다.
 
북한은 미국이 먼저 적대정책을 철회하거나 동시이행을 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의 ‘동시이행’이라 함은, i) 미국이 중유공급을 재개하고 식량지원을 확대함과 동시에 북한이 핵프로그램 포기를 선언하며, ii) 미국이 KEDO의 경수로 지원 중단으로 인한 전력손실을 보상하고 불가침을 약정하는 것과 동시에 북한이 핵시설을 동결하고 IAEA의 사찰을 허용하며, iii) 일본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과 동시에 북한이 미사일 문제를 타결하고, iv) 경수로가 완공되는 시점에서 북한이 핵시설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이다. 북한의 주장에 대하여 미국은 북한이 먼저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를 실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양국은 서로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첫 번째 회담은 후속 회담을 위한 날짜도 정하지 못한 채 아무 소득없이 끝났다.
 
회담 후 미국이 “평화적 해결을 위한 다자간 회담의 유용성에 대하여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언급한 것에 대하여, 북한은 “기대에 어긋나는 탁상공론에 불과해… 이런 백해무익한 회담에 더는 그 어떤 기대나 흥미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자위적 조치로서 핵억제력을 계속 강화해 나가는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하고 있다”며 부정적 입장을 드러냈다.

2. 제2차 회담
 
제 2차 6자회담은 2004년 2월 25일부터 28일까지 베이징에서 이루어졌다. 형식적으로 의장성명을 채택하기는 했지만 북핵위기 일갈을 위한 가시적인 소득은 역시 없었다. 제 1차 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북한이 먼저 핵을 폐기할 것을 요구했고, 북한은 미국이 먼저 적대정책을 포기할 것을 주장하는 수준에 그쳤다.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와 관련하여, 북한은 평화적으로 사용되는 핵과 군사목적으로 사용되는 핵을 분리하여 핵폐기를 논의할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북한이 보유한 모든 핵을 폐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물론 의견일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불어 미국이 북한에게 고농축 우라늄을 동결하라고 요구한 데 대하여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였다. 핵 동결에 따르는 보상에 관한 논의는 없었다.

3. 제3차 회담
 
제3차 6자회담은 두 차례의 실무회의를 거쳐 2004년 6월 23일에서 26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제3차 회담에서 북한은 핵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미국에 에너지 지원, 경제제재 해제, 테러지원국 리스트로부터의 삭제를 요구하였다. 반면 미국은 북한이 먼저 모든 핵 관련 활동을 투명하게 밝히고 장비들을 제거하며, 외부 감시를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 회담에서 8개항의 의장성명이 채택되었지만 이전 회담들과 마찬가지로 양국이 뾰족한 합의점을 찾지는 못하였다.

4. 제4차 회담
 
미국 대통령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자, 북한은 2005년 2월 10일 외무성 성명발표를 통하여 다시 핵보유를 주장하며 6자회담 참가거부를 선언하였다. 같은 해 3월 31일에는 대변인 담화를 통하여 북한이 핵무기 보유국이 된 이상 6자회담은 군축회담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5월 11일에는 중앙방송을 통하여 5MW 원자로에서 8000개의 폐연료봉 추출을 완료했다고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에 중국과 한국은 북한을 6자회담에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라이스도 북한을 '주권국가'라고 부르는 등 부정적인 인식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7월 9일 미국 국무부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과 북한 외무성 부성 김계관 간의 베이징 회담에서 북한은 6자회담에 복귀할 것을 약속하게 된다.
 
제4차 6자회담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 번째 회담은 애초 합의된 일정보다 다소 늦은 2005년 7월 26일 시작되어 8월 7일까지 진행되었다. 다만 이 회담에서도 북한과 미국의 의견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한국이 경수로 설치 대신 북한으로 직접 송전하는 방안을 제의하기도 하였는데 채택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2005년 9월 13일 시작되어 9월 15일까지 진행된 두 번째 회담에서는 북미 양국이 타결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이 회담의 결과로 9월 19일 발표된 공동성명은 일단 i) 북한이 핵무기와 핵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빠른 시일 내에 NPT에 복귀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하며, ii) 미국이 한반도에 핵무기를 설치하지 않고, 어떤 무기로든 북한을 침공할 의도가 없음을 선언하며, iii) 북미 양국이 평화공존을 위해 상호 주권을 존중하고 외교관계를 정상화할 것을 기본적인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iv) 한국이 핵무기를 반입하거나 배치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재확인하고, 한국 영토에 핵무기가 없음을 확인할 것, v) 5개 당사국이 북한에 경수로를 지원할 적절한 시기에 대하여 논의하고 북한에 에너지 원조를 해 줄 것, vi) 북한과 일본이 외교관계를 정상화할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이 가론 9.19 공동성명은 북한이 핵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포기를 서약한 최초의 사건이다. 또한 1953년 휴전협정 이래 남북한과 주변 국가들이 한반도 안보문제에 관하여 다자 국제문서로 합의한 최초의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개발 및 핵프로그램을 포기하고 NPT와 IAEA에 복귀할 것을 약속하기는 했지만, 핵을 폐기하는 시점과 폐기과정 및 시간, 북미/북일 관계정상화의 속도와 조건, 에너지 제공 문제 등 구체적인 사항에서는 문제를 남겼다. 더구나 공동선언문의 해석에 관하여도 북미 양국의 입장이 달랐다. 북한은 미국이 먼저 경수로를 제공하면 NPT와 IAEA에 복귀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을 포함한 5개국은 북한이 먼저 핵을 폐기해야 경수로 제공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5. 제5차 회담
 
2005년 9월 15일 미국은 마카오 소재 중국계 방코델타아시아 은행(BDA)이 북한의 달러 위조와 자금 세탁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그러자 BDA는 북한과의 금융거래를 중단할 것을 선언하였고, 뒤이어 중국은행 마카오지점 등 마카오 지역의 은행들과 싱가포르, 스위스 등지의 은행들도 미국을 의식하여 북한과의 금융거래를 중단하였다. 북한은 이를 사실상의 경제제재로 받아들였고, 후속 6자회담에서 BDA 문제에 대해 미국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런 와중에 첫 번째 5차회담이 2005년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되었다. 이 첫 번째 회담에서 당사국들은 9.19 공동성명의 이행을 위한 의장성명을 발표하였다. 의장성명은 일단 i) 북한은 회담 후 60일 이내에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고, IAEA의 사찰을 수용할 것, ii) 5개국은 긴급지원 차원에서 북한에 중유 5만톤을 지원하고, 미국은 회담 후 60일 이내에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고 대적성국교역법의 적용을 종료할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였다. 또한 후속 단계로써 iii) 북한은 모든 핵프로그램을 투명하게 신고하며 흑연감속로와 재처리시설을 포함한 모든 핵시설을 불능화할 것, iv) 5개국은 북한에 중유 95만톤을 지원하고, 중국, 미국, 러시아, 한국은 특히 대북 경제지원을 형평에 맞게 분담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북한과 과거사를 비롯한 미결문제를 해소한 후 경제지원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6년 1월 3일, 북한은 미국이 대북 금융제재를 철폐하기 이전에는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미국은 이에 대하여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유포를 지원하였다는 혐의로 스위스 공업물자 도매회사의 미국내 자산을 동결하였고, 2006년 5월에는 미국 기업들이 선박을 북한선적으로 등록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선박제재로 대응하였다. 그러자 북한은 2006년 7월 5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맞춰 미사일을 시험발사하였다. 이에 UN 안보리는 2006년 7월 16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면서 미사일 관련 물자·상품·기술·재원을 북한으로 이전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 1695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후 한국은 미국을 설득하여 6자회담을 재개하려는 노력을 하였지만 2006년 9월 26일 북한은 '세계 지배를 꿈꾸는 미국과의 핵 협상은 불가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북한은 같은 해 10월 3일에 핵실험을 예고하였으며 10월 9일 최초의 지하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이에 UN 안보리는 다시 만장일치로 대북제재 결의안 1718호를 통과시키기에 이른다.
 
2006년 11월 1일 북한은 금융제재 문제를 해결할 것을 조건으로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고 밝혔으나 미국은 북한의 달러 위조와 자금 세탁에 따른 금융제재는 6자회담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2006년 12월 18일 두 번째 5차회담이 시작되었지만 북한이 미국이 먼저 BDA 문제를 비롯한 대북 제재를 해제하지 않으면 6자회담을 계속할 수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회담은 중지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계속해서 북미관계 개선과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고, 2007년 1월 16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된 북미 베를린 회동에서 BDA 문제 해결 등을 통한 6자회담 재개와 영번 핵시설 동결에 관하여 구체적인 협의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2007년 2월 8일부터 13일까지 세 번째 5차회담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세 번째 5차회담에서는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가론 2.13 합의가 채택되었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i) 30일 내로, 6개 실무그룹 회의를 개최하여 한반도 비핵화, 북미 관계정상화, 북일 관계정상화, 경제협력, 동북아 평화안보체제에 관하여 논의하고, 미국은 BDA와 관련한 동결자금을 해제할 것, ii) 60일 내로, 북한은 영변의 원자력발전소 및 핵시설을 동결하며 나머지 5개국은 긴급지원으로 중유 5만톤을 공급할 것. iii) 이후 북한이 모든 핵프로그램을 신고하고 이를 불능화할 경우, 나머지 국가들은 북한에 중유 96만톤을 지원할 것. 2.13 합의 이후 5개의 실무그룹회의가 개최되었으며, 납치 문제에 대하여 대립관계에 있는 북일 관계정상화 실무그룹회의를 제외하고는 모두 원활하게 진행이 되었다.
 
2.13 합의는 9.19 공동성명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세부사항에 관한 구체적인 이행을 위하여 실무그룹을 설치하였고, 초기 이행 이후 6개국 외무장관 회담 개최를 규정하여 제도적인 틀을 구축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또한 여태까지의 회담이 북미관계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것에 대하여 2.13 합의는 한걸음 나아가 동북아평화안보협력도 논의하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6. 제6차 회담
 
제6차회담의 첫 번째 회의는 2007년 3월 19일 개최되어 22일까지 진행되었다. 먼저 3월 19일 북한이 BDA 대북제재문제를 먼저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미국은 당일 오전 미국은 BDA에 동결된 북한 자금을 전액 반환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BDA 해결의 물리적 증거로서 미국이 송금증서를 보여준 후에야 회담을 계속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3월 20일 개최될 예정이었던 오전 수석대표 회의는 개최되지 못하였다. 20일 오후 북한의 외무성 부상 김계관과 미국 국무부 차관보 크리스토퍼 힐이 회동을 가졌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21일에 진행될 예정이던 오전 수석대표 회의도 동결자금의 입금 지연으로 개최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3월 22일, 6개국들은 수석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최대한 빠른 시기에(at the earliesst opportunity) 차기회담을 개최하자는 의장성명만을 채택하고 회담을 종료하였다.
 
2007년 6월 19일 BDA 문제가 마침내 해결되었으며, 북한은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였다. 그리고 제6차회담 수석대표회의가 7월 18일에서 7월 20일까지 진행되었다. 미국은 대통령 부시의 임기 내에 북핵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을 전달하면서, 2007년 안에 북한이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모든 핵프로그램을 신고 후 전면 종료한 후 2008년 내로 나머지 비핵화 과정을 이행해 줄 것을 요구했다. 북한은 핵시설 불능화와 핵프로그램 신고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미국이 적대노선을 취할 시에는 얼마든지 정책을 변경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핵시설 불능화 및 핵프로그램 신고를 조건으로 중유 95만 톤 상당의 지원을 받겠다고 밝혔다.
2007년 9월 27일부터 10월 3일까지 두 번째 회담이 진행되었다. 이 회담에서 마침내 채택된 가론 10.3 합의는 i) 북한이 2007년 말까지 핵시설을 불능화하고 핵프로그램을 신고하며, ii)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에서 삭제하고 북한에 대한 대적성국무역법 적용을 해제하며, iii) 5개국이 중유 95만에 상당하는 경제적 보상을 할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10.3합의에 적시된 후속조치에 따라 북한은 2008년 6월 26일 핵프로그램 신고서를 제출하였고, 이튿날인 6월 27일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였다. 북한이 신고서를 제출한 날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의회에 통보하였고, 적성국 교역법의 적용 또한 종료하였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지정해제조치는 10월 11일 발효되었다. 10월 2일에는 미국 국무부 차관부 힐이 북한을 방문해 신고서 검증과 관련하여 합의를 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12월 8일부터 11일 사이에 개최된 6자회담 수석대표회의에서 북한이 제출한 핵 신고서의 시료채취 부분 등 핵심사항에 관한 합의가 도출되지 못하였다. 이후 6자회담은 다시 개최되지 못하였고 2013년 3월 현재까지 교착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2009년부터 북한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안보질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Ⅳ] -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및 제2차 핵실험, 이후 경과
 
2009년 4월 5일 북한은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였다. 일본은 북한의 발사 직후 의장국인 멕시코에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 개최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제1차 비공개협의가 개최되었으나 구체적인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4월 14일 15개 회원국의 만장일치로 로켓 발사를 규탄하는 의장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핵시설을 원상복구하고 불능화 조치를 복구하였으며 6자회담을 전면 거부하였다. 그리고 2009년 5월 25일 제 2차 핵실험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유엔 안보리는 같은 해 6월 12일 포괄적인 대북제재 조치가 포함된 결의안 1874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2009년 12월 8일에는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 보즈워스가 북한을 방문하여 회담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6자회담 재개에 관한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하지는 못하였다.
 
2010년 1월 11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하여 6자회담에 복귀하는 대신 유엔 안보리 제재를 해제하고, 평화협정 협상을 개시할 것을 요구하였다. 2월에는 중국이 6자회담 재개를 위한 협의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 26일 천안함 사태의 발생으로 인해 6자회담 재개 논의는 중단되고 말았다. 
 
2010년 11월 9일, 북한은 교수 시그프리드 헤커 등 미국의 핵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영변 핵시설 내 경수로 건설현장 및 우라늄 농축시설을 공개하였다. 11월 23일에는 연평도에 대한 포격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2011년 5월 20일에는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하여 창춘, 양저우, 난징 등을 시찰하고, 베이징에서 주석 후진타오, 총리 원자바오를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과 면담을 가졌다. 같은 해 7월 22일에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남북 양측이 회담을 통하여 비핵화와 관련하여 광범위한 의제에 관해 각자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7월 28일에는 뉴욕에서 북미 회담이 있었다. 8월 20일에는 김정일이 러시아를 방문하여 울란우데에서 대통령 메드베데프와 24일 정상회담을 가졌고, 돌아오는 길에 8월 25일 중국 동북지역을 방문하여 국무위원 다이빙궈를 접견하였다.
posted by ON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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